객관적 구원과 주관적 개인 구원에 관하여
스데반 황 목사
16세기 루터와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 개혁은 중세 교회의 미신적 신앙에 쐐기를 박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이후로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다시금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때 종교 개혁과 더불어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발견된 것은 신앙의 객관성이다. 쓰여진 성경 그 자체가 객관적 진리로서 진리 그 자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도 어떤 사람의 지어낸 이야기이거나 어떤 교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속에 일회적으로 발생했던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즉, 종교 개혁은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객관적인 진리인 성경과 객관적 구속사적 사건인 십자가와 부활 위에 놓은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종교 개혁은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a Fide (오직 믿음), Solus Christos (오직 예수),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Th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주창하며 신앙의 참된 뿌리를 다시 찾았다.
신학적으로 이 시대, 곧 16세기를 히스토리아-살루티스(Historia-Salutis, 객관적 구원사, 역사적 구속사)을 발견한 시대로 본다.
그런데 17세기로 들어오면서 신앙인들은 이 객관적인 십자가의 구원 사건과 개인과의 관계성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Conversion (회심), Regeneration (중생) 등이다. 다시 말하면 16세기는 What Jesus Christ Has Done for Us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나)를 발견한 것인 반면, 17세기 이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가를 체계화 시키며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our Heart (우리 마음 속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이를 Ordo-Salutis(개인 구원의 서정)를 발견하는 세기라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17세기를 통하여 결국 한 영혼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과정을 체계화하였다. 회개, 중생, 믿음, 양자됨, 성화, 영화 등을 조직 신학화하였다.
그러나 Ordo-Salutis (개인 구원의 서정)가 강조되면서 사람들은 Historia-Salutis를 잃어 버리는 불균형 증상을 다시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Ordo-Salutis 를 강조하는 쪽은 율법이나 성령 체험으로 흐르고, (예를 들어 Anabaptist 계열: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며 동시에 성령의 내적 체험을 강조 하였다), Historia-Salutis 쪽을 강조하는 파는 성찬식 및 예배 의식 등의 객관적인 예식에서 신앙의 의미를 찾으려 하였다(영국의 성공회나 독일의 루터파).
17세기 말이 되면서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다시금 점검케 된다. 그 때 나오는 단어는 Assurance (구원의 확신), Election (선택) 등이다. 이때 영국에서 1643년 경에 균형 잡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등장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교회사에 있어서 종교 개혁의 원리에 입각하여 객관적 구원 사건과 개인적 구원 서정을 연결하여 다룬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 한다. 이 신앙 고백으로 하여금 이 땅의 많은 교회는 서로 같은 믿음과 같은 의견을 갖게 된다. 이는 교회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결과를 빚어낸 것이다. 그 후 30년 후에는 “취리히 일치 신조”(The Formula Helvetica Consensus, 1675)라는 신앙 고백이 나오게 된다.
특히 이 “취리히” 신앙 고백(The Formula Helvetica Consensus)은 예수님의 하신 일과 성령님의 하신 일의 연관성을 잘 설명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예를 들어 19세기의 아키발드 알렉산더 핫지(A. A. Hodge, 구 프린스턴 신학교 학장)는 이 신앙 고백을 프린스턴 신학교의 공식 신앙 고백으로 채택하면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취리히 일치 신조의 핵심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품고 있는 모든 의도를 보다 더 잘 정돈하고 개발한 언약 신학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더욱 강력하게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죄인을 용서하여 자유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사역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과 연합됩니다. 지금 시대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위대한 일을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성취하시는 시대입니다. “취리히 일치 신조”의 장점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묶음으로써 이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순전히 정서적인 면에서만 보지 않고 주께서 역사 가운데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적인 위대한 일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주요 쟁점은 그리스도는 그분의 공로로 우리를 위해 성령과 우리의 믿음을 얻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주께서는 그분의 공로로 우리를 위해 우리의 믿음 그 자체를 얻어내셨습니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내 마음 안에서 무엇을 체험하였느냐가 아니라, 내가 마음으로 체험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언약 신학입니다.”
죠나단 에드워드의 글을 보아도 우리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작용이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아름다운 것이지만,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면서도 말씀에 뿌리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관계가 없다면, 이는 단지 정신 착란 및 사탄의 역사로 본다. 가령 예배에 있어서도 자신의 감정 변화가 말씀의 선포 내용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성의 작용 후에 있을 때에는 성령의 바른 역사이지만, 눈물과 기쁨과 감정의 폭발 현상의 원인이 만일 악기나 어떤 종교적 분위기 또는 군중 심리에 있을 때는 삶의 변화가 없는 감정주의 예배로서 우리로 신앙의 방향을 크게 잃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현상은 신비주의의 정체로서 바로 성경의 지식과 믿음 안에서의 바른 이성의 활동을 배제하는 현상이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바른 신앙과 그른 신앙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분별하도록 돕는다.
“나의 신앙은 나의 기준에 따른 이기심의 산물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나의 삶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것인가?”
아무리 감정 체험이 있어도, 영적 능력이 있어도.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죠나단 에드워드의 대표적인 표현 중에 “My Faith is to love God for His own sake.”(내 믿음은 단지 하나님만으로 인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은 우리가 항상 기억하여야 할 명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즐겁게 하고 나의 뜻을 이루고 나의 경험을 강조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비롯되는 자연스런 믿음이 참 믿음인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의 기독교 역사는 Historia-Salutis와 Ordo-Salutis 의 관계 정립의 기간이며 이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활동들의 실수를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요한 웨슬리(John Wesley) 같은 경우도 “인간의 힘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할 수 있다”(Perfectionism)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Historia-Salutis를 이해하지 못한 경우이다. 다시 설명하면, Historia-Salutis가 우리의 Ordo-Salutis의 뿌리와 근거가 될 때만이 우리의 믿음이 확신 가운데 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 곳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객관적인 영원한 역사,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6-8).
객관적 구원과 주관적 개인 구원에 관하여
스데반 황 목사
16세기 루터와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 개혁은 중세 교회의 미신적 신앙에 쐐기를 박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이후로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다시금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때 종교 개혁과 더불어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발견된 것은 신앙의 객관성이다. 쓰여진 성경 그 자체가 객관적 진리로서 진리 그 자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도 어떤 사람의 지어낸 이야기이거나 어떤 교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속에 일회적으로 발생했던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즉, 종교 개혁은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객관적인 진리인 성경과 객관적 구속사적 사건인 십자가와 부활 위에 놓은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종교 개혁은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a Fide (오직 믿음), Solus Christos (오직 예수),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Th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주창하며 신앙의 참된 뿌리를 다시 찾았다.
신학적으로 이 시대, 곧 16세기를 히스토리아-살루티스(Historia-Salutis, 객관적 구원사, 역사적 구속사)을 발견한 시대로 본다.
그런데 17세기로 들어오면서 신앙인들은 이 객관적인 십자가의 구원 사건과 개인과의 관계성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Conversion (회심), Regeneration (중생) 등이다. 다시 말하면 16세기는 What Jesus Christ Has Done for Us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나)를 발견한 것인 반면, 17세기 이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가를 체계화 시키며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our Heart (우리 마음 속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이를 Ordo-Salutis(개인 구원의 서정)를 발견하는 세기라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17세기를 통하여 결국 한 영혼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과정을 체계화하였다. 회개, 중생, 믿음, 양자됨, 성화, 영화 등을 조직 신학화하였다.
그러나 Ordo-Salutis (개인 구원의 서정)가 강조되면서 사람들은 Historia-Salutis를 잃어 버리는 불균형 증상을 다시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Ordo-Salutis 를 강조하는 쪽은 율법이나 성령 체험으로 흐르고, (예를 들어 Anabaptist 계열: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며 동시에 성령의 내적 체험을 강조 하였다), Historia-Salutis 쪽을 강조하는 파는 성찬식 및 예배 의식 등의 객관적인 예식에서 신앙의 의미를 찾으려 하였다(영국의 성공회나 독일의 루터파).
17세기 말이 되면서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다시금 점검케 된다. 그 때 나오는 단어는 Assurance (구원의 확신), Election (선택) 등이다. 이때 영국에서 1643년 경에 균형 잡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등장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교회사에 있어서 종교 개혁의 원리에 입각하여 객관적 구원 사건과 개인적 구원 서정을 연결하여 다룬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 한다. 이 신앙 고백으로 하여금 이 땅의 많은 교회는 서로 같은 믿음과 같은 의견을 갖게 된다. 이는 교회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결과를 빚어낸 것이다. 그 후 30년 후에는 “취리히 일치 신조”(The Formula Helvetica Consensus, 1675)라는 신앙 고백이 나오게 된다.
특히 이 “취리히” 신앙 고백(The Formula Helvetica Consensus)은 예수님의 하신 일과 성령님의 하신 일의 연관성을 잘 설명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예를 들어 19세기의 아키발드 알렉산더 핫지(A. A. Hodge, 구 프린스턴 신학교 학장)는 이 신앙 고백을 프린스턴 신학교의 공식 신앙 고백으로 채택하면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취리히 일치 신조의 핵심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품고 있는 모든 의도를 보다 더 잘 정돈하고 개발한 언약 신학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더욱 강력하게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죄인을 용서하여 자유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사역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과 연합됩니다. 지금 시대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위대한 일을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성취하시는 시대입니다. “취리히 일치 신조”의 장점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묶음으로써 이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순전히 정서적인 면에서만 보지 않고 주께서 역사 가운데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적인 위대한 일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주요 쟁점은 그리스도는 그분의 공로로 우리를 위해 성령과 우리의 믿음을 얻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주께서는 그분의 공로로 우리를 위해 우리의 믿음 그 자체를 얻어내셨습니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내 마음 안에서 무엇을 체험하였느냐가 아니라, 내가 마음으로 체험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언약 신학입니다.”
죠나단 에드워드의 글을 보아도 우리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작용이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아름다운 것이지만,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면서도 말씀에 뿌리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관계가 없다면, 이는 단지 정신 착란 및 사탄의 역사로 본다. 가령 예배에 있어서도 자신의 감정 변화가 말씀의 선포 내용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성의 작용 후에 있을 때에는 성령의 바른 역사이지만, 눈물과 기쁨과 감정의 폭발 현상의 원인이 만일 악기나 어떤 종교적 분위기 또는 군중 심리에 있을 때는 삶의 변화가 없는 감정주의 예배로서 우리로 신앙의 방향을 크게 잃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현상은 신비주의의 정체로서 바로 성경의 지식과 믿음 안에서의 바른 이성의 활동을 배제하는 현상이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바른 신앙과 그른 신앙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분별하도록 돕는다.
“나의 신앙은 나의 기준에 따른 이기심의 산물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나의 삶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것인가?”
아무리 감정 체험이 있어도, 영적 능력이 있어도.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죠나단 에드워드의 대표적인 표현 중에 “My Faith is to love God for His own sake.”(내 믿음은 단지 하나님만으로 인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은 우리가 항상 기억하여야 할 명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즐겁게 하고 나의 뜻을 이루고 나의 경험을 강조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비롯되는 자연스런 믿음이 참 믿음인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의 기독교 역사는 Historia-Salutis와 Ordo-Salutis 의 관계 정립의 기간이며 이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활동들의 실수를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요한 웨슬리(John Wesley) 같은 경우도 “인간의 힘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할 수 있다”(Perfectionism)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Historia-Salutis를 이해하지 못한 경우이다. 다시 설명하면, Historia-Salutis가 우리의 Ordo-Salutis의 뿌리와 근거가 될 때만이 우리의 믿음이 확신 가운데 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 곳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객관적인 영원한 역사,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6-8).